p.21

철용이 원하는 대로 한 말씀만 했다가는 사달이 날 터였다. 입을 여는 순간 할 말이라고는 욕밖에 없었다. 야, 이 새끼야, 너 나를 언제 봤다고 아버님이야, 정근은 온몸을 휘감는 벌레같이 징그러운 상념에 사로잡혔다. 가만히 있으면 된다. 걷어차지 않고, 그러니까 미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된다. 정근은 실로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 그 상황을 견뎠다.유나가 죽었다. 유나의 친구들이었다. 지숙도 그렇고 그들도 그렇고, 나보다 유나에 관해 더 많이 알고 있다. 나는 모른다. 나는 자격이 없다.

나는 유나에 관해 자격이 없다.

화내고 싶은 충동을 참게 해 준 유일한 이유였다.

 

아빠,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상처를 주는 것 같아요. 멀리 있는 사람들은 상처를 줄 수조차 없죠.

-며칠 전에 아기 유산했다잖아요.

-그러니? 전혀 몰랐어.

-어떻게 그것도 몰라요? 아줌마 배부를 때까지 불러다 일 시켜 놓고.

 

 

Posted by 바밤바밤바
,